趙孟 公初許籍襄陽府豐 攬隱人高麗開國 功臣位至門下侍 中平章事賜今名 ○ 墓壙赤城洞 寅坐今楊州郡真 乾面松陵里五 三番地四號○ 墓 後數十年有 高麗朝奉墳誌折 墓並所經典曲折 及遺事文詳載 世錄○ 有墓兩外 後孫撰校張維 ○ 擬孫左護將補 陽府朴孝碑隷 後孫左護將尹 校理吳琪篆記 擬孫大提學復陽 ○ 庚辰譜日尚 州譜以散貝邑邑 太師添書公帥 而他無可據故錄 于下○ 見附錄
趙孟(조맹)
공(公, 조맹)은 처음에 **허적(許籍, 호적 등록)이 양양부(襄陽府) 풍(豐)**에서 이루어졌다.
은둔하였던 분이었으나, **고려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공을 세워,
문하시중(門下侍中)까지 관직이 올랐으며,
중서평장사(中平章事, 고려의 재상급 관직)에 올라 지금의 이름(趙孟)을 하사받았다.
○ 묘소(墓壙)는 **적성동(赤城洞)**에 위치하며,
묘소의 방향은 **현재의 양주군(楊州郡) 진건면(真乾面) 송릉리(松陵里) 5-3번지(三番地四號)**에 있다.
○ 묘는 후손들이 몇십 년 후에 다시 세웠으며,
**고려 조정에서 봉헌한 묘지명(墳誌, 묘비문)**이 있으며,
묘소에 관한 상세한 기록과 유사(遺事, 유품과 관련된 이야기) 등이 전해지고 있다.
○ 묘지는 두 개로 존재하며,
후손 중 장유(張維)가 편찬하여 기록하였고,
○ 후손 중 **좌호장군(左護將軍) 박효(朴孝)**가 비석을 세웠으며,
후손 **좌호장군 윤씨(尹氏)**와 **교리(校理) 오기(吳琪)**가 기록을 남겼다.
○ 후손 대제학(大提學) 복양(復陽)이 다시 보완하여 정리하였다.
○ **경진년(庚辰年, 어떤 특정한 해를 의미)**에 족보를 편찬하였으며,
○ 본 족보는 산서(散貝)와 읍(邑)에 분산되어 기록됨,
태사(太師)가 공의 기록을 보완하였으며,
다른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서 기록을 마친다.
○ 추가 내용은 부록(附錄)에서 확인할 수 있다.
(AI 해석)
"庚辰(경진)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노니,
시조(始祖) 이하로 태평한 시대가 오래 지속되었으며,
세대가 흐르면서 많은 계보가 전해지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세계(世系, 계보)를 보완하고 정리하여 기록하였으며,
시조 이전의 계보는 상세하지 않으므로 임시로 기록하였다.
본 조정(朝廷)에서 벼슬을 한 자들은
고(故) 평장정승(平章政丞) 문의공(文懿公)의 후손들 중
문중(門中)에서 명확한 계파가 확인되는 자들을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전직 공(殿直公) 계열의 후손들도 남아있으므로,
그 세대를 정리하여 태종(太宗)의 손자로부터
육세손(六世孫)인 의공(懿公) 직차(直次)부터
비로소 정식으로 세계를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기존의 족보(族譜)를 참고하여 기록하였으며,
역사적 명칭 또한 기존과 동일하게 사용하였다.
족보의 제1도(第一圖)는 정편(正編)에 포함되어 있으며,
본 조정에서 관직을 지낸 자들의 세대는
전직 공의 후손 중 육세손인 의공이 태종의 손자임이 확인되므로,
의공 직차를 기점으로 계보를 정리하였다.
이 족보는 경술년(庚戌歲)에 초판이 작성되었으며,
세대 간의 관계가 시대에 부끄럽지 않도록
신중히 기록하였음을 밝힌다.
이후 무진년(戊辰歲)에 다시 개정하여 중간 수정을 거쳤으며,
이번에 다시 중간 부분을 개정하여 중복을 정리하였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후손들이 쉽게 열람할 수 있도록 하였다."
(AI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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