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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양조씨 평장사공파

고려말 왜구의 침략과 할아버지들(3부작 2편, 왜구의 침략)

by 구엽하늘 2025.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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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 아닌, 역사의 짜집기로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절대 고증이라는 개념은 없음, wiki의 내용을 주로 참고하였음)

풍양조씨 평장사공파 2세 봉상시 소윤 휘 천옥 할아버지에 대해 공부하며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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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원나라는 쿠빌라이 칸의 사망과 함께, 일본정벌이라는 목표도 사라지게 되었다.

이로인해 원나라에서는 고려의 필요성이 없어지고,

왕게임에서 가위바위보를 지면 자리를 뺐기듯

원나라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내렸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1350년...

 

[원나라]

1350년 전후로 홍건적의 난과 전염병으로 원나라는 멸망의 길로 가고 있었다.

이런 원나라의 혼란은 고려에게 기회이자 위기로 다가온다.

 

[일본]

여몽연합군에 침략당했던 일본은, 50년 후 (1336년) 2개의 나라로 대립하게 되었다.

일본의 남북조 시대이다.

일본 내륙에서는 북조가

고려와 가까운 규슈 근처는 남조가 우세하였다.

 

[일본 대마도]

여몽연합군의 침략 때, 원나라의 약탈에 의해 황폐화되었고,

그 이후 원나라에 의해 고려와의 무역도 끊기자

대마도는 해적의 소굴이 되어 갔다.

 

[북조 왜구 - 쇼니 요리히사]

북조세력인 규슈지방 다자이후 영주였던 쇼니 요리히사는,

보급이 원활하지 않자, 바다 건너 고려를 바라보고 있었다.

과거의 원나라와 고려의 강함은 보이지 않고,

이빨빠진 호랑이가 되었다고 판단하여,

대마도 영주 소 쓰네시게에게, 병선과 병력을 지원해 줄테니,

고려를 약탈하라고 지시한다.

'대마도의 해적 세력을 품으며, 고려와 원을 보급기지로 삼을 것이다.

무예를 겨루는 것이 아니지만,

일본 안에서 하는 도둑질도 아니고, 들키지만 않으면

그렇게 자부하는 무사도에도 흠이 아닐 것이다.'

1350년 해적이라고 우기며, 고려에서 노략질을 시작하다가,

1362년 규슈에서 남조에게 밀리면서 무사에서 해적으로 직업을 바꾼다.

1364년 이작도 전투에서 크게 이기지만, 진해전투에서 큰 패배를 맛본다.

이후의 왜구 메인 타이틀은 쇼니 요리히사에서 기쿠치로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고려 충정왕]

충정왕 2년 1350년 동국역사 권5(고려기)

'봄 2월에 일본이 남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일본이 원나라가 공격했던 것에 원한을 품고 항상 우리에게 분함을 풀고자 하였다.

그러나 원나라를 두려워하여 감히 드러내지 못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원나라의 정사가 쇠약해진 것을 알고

고성 등지를 침략하니, 합포의 천호 최선이 그들을 격파하였다.'

고려는 이 사건이 앞으로 겪게될

42년/506회라는 왜구 침략의 시작점이라는 사실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고려 공민왕]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고, 1352년 왜구의 두 번째 침략을 맞게 된다.

'봄 정월에 찬성사 유탁을 전라도 만호에 임명하여 일본의 침략을 막도록 하였다.

유탁이 군사를 지휘함이 엄정하였고 병사들과 고락을 같이 하였다.

일본이 만덕사에 침임하여 약탈하니, 유탁이 빠른 기병으로 추격하여 붙잡았다.

잡혀간 포로들을 찾아서 돌아오니, 이후로 일본이 다시는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공민왕은 이번 왜구의 침략때 계엄령을 내릴 정도로, 심각하게 생각하였다.

하지만 크게 물리치고, 다시는 못 올 것이라 생각하며,

남쪽이 아닌 북쪽을 바라보게 된다.

 

[고려와 원나라]

원나라에서 일어난 반란진압에 유탁, 최영 등을 보내 지원하면서도,

고려는 왜구의 간헐적인 약탈을 막아내었다.

원나라 반란진압에 참여했던 최영이 분석한 원나라의 쇠락을 들은

공민왕은 반원개혁을 단행하고, 쌍성총관부를 탈환하며 북쪽의 옛 영토를 수복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1359년 4만, 1361년 20만명의 홍건적에 의한 침략을 겪으면서,

원나라와 관계를 회복하려 노력했으나, 홍건적의 침략을 물리친 이후인

1364년에 원나라의 기황후를 주축으로하여 왕게임이 시작되었다.

공민왕은 가위바위보를 이기고 원나라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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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2년 윤3월1일, 공민왕은 수도 개경에 계엄령을 내렸다.

“재추(宰樞)에서부터 이서(吏胥)에 이르기까지 사람마다 
활 1개, 화살 50개, 검(劒) 한 자루, 창(戈) 한 자루씩 갖추게 한 다음 
숭문관(崇文館)에서 사열하였다.”

1360년 8월 공민왕은 삼년상 제도를 없앴는데,
이 때 사방에서 전쟁이 일어나 사람을 쓰는 일이 매우 급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라의 제사와 제수에 대한 관리를 맡고 있던,
봉상시 소윤 조천옥도 칼과 활을 들고 전장에 나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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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민왕]

고려는 1368년 주변정세를 다시 정립하고 있었다.

원나라를 배척하고, 새로 건국된 명나라에는 우호적인 태도로 대했다.

일본 북조에 사신을 보내, 왜구의 노략질을 멈춰달라고도 요청했다.

왜구의 괴롭힘에도 불구하고 원나라와 명나라의 전투 속에,

1370년 공민왕은 요동이라는 틈새를 공략해내지만,

명나라의 태클과 유지가 힘들다는 사유로 요동에서 물러난다.

 

[남조 왜구 기쿠치 일족]

1362년 쇼니 요리히사를 몰아내고 규슈를 장악한 기쿠치 일족은,

쇼니 요리히사가 하듯이 고려에서 노략질을 시작하게 된다.

1368년 고려가 북조에 사신을 보내어, 왜구의 노략질을 그만 두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을 때,

북조는 이전의 쇼니 요리히사가 했던 노략질까지 모두 기쿠치가 한 것으로 떠 넘긴다.

기쿠치는 쇼니 요리히사보다 더 강한 전투력으로 고려를 괴롭힌다.

쇼니 요리히사의 병선은 20~50척 정도이고,

기쿠치의 병선은 200~300척으로 보인다.

 

[고려 공민왕]

요동정벌이후 북쪽은 정리되었고, 왜구만 남았다.

왜구의 약탈로 조운선과 조창이 마비되어 세금을 걷지 못하고,

해안가 근처의 마을에는 사람이 살지 못하게 되었다.

공민왕은 화포를 준비하면서 명나라에 도움을 요청하고,

전함을 새로 건조하는 등의 준비를 하지만,

1374년 이를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고려 우왕]

1374년 즉위한 우왕은 1375년 서북면원수로 밀직부사 박보로를 기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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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상시 소윤 조천옥은
아버지 조신혁과 같은 밀직부사 출신의 
박보로 상원수 휘하의 부사가 되어 
서북면 방어에 참여하고 있었다.

1377년 기쿠치 일족은 북조에게 대패하고,
그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고려에서 노략질을 또 시작한다.

경남, 전남 뿐 아니라 제주도, 강화도, 황해남도 등
기쿠치의 왜구가 전국을 약탈하고 다녔다.

1377년 7월 왜구가 풍주(황해도 송화군)를 공격해왔고,
박보로 상원수가 물리쳤으나,
이 전투에서 조천옥 할아버지는 전사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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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옥 할아버지 사후의 정세변화]

1377년 8월 이성계가 황해남도 해주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다.

1377년 9월 정몽주가 사신으로 일본에 가서, 왜구 토벌에 대한 일본 북조의 협력을 이끌어낸다.

1377년 10월 최무선의 노력과 건의로 화약을 다루는 화통도감이 신설되고, 각종 화포와 전함의 개조가 이루어진다.

 

고려말 왜구의 침략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