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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 아닌, 역사의 짜집기로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절대 고증이라는 개념은 없음, wiki의 내용을 주로 참고하였음)
풍양조씨 평장사공파 중조 평장사 휘 신혁 할아버지에 대해 공부하며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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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1260년 쿠빌라이가 칸으로 등극하고,
몽골 내부의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1271년 원나라를 세운다.
그리고 본격적인 남송과의 전쟁을 하게된다.
쿠빌라이 칸은 남송과의 전쟁중,
남송의 주무역국이 섬나라 일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고려를 이용하여, 일본을 정복하려는 결심을 굳힌다.
“대륙을 다스리려면 바다를 넘어야 한다.”
[원종]
원나라의 일본정복에 대한 준비로 군량미와 병선 건조 및 군사징병을 요청받았다.
외부로는 (당신네) 몽골과의 전투로 군사력이 약해지고,
내부로는 삼별초의 존재로 조운(세금징수)이 마비되었으며,
돌림병으로 많은 백성이 죽는 등
이런 저런 사유로 힘들다는 의견을 피력했지만,
“대칸의 명령은 곧 하늘의 명령이다”라는 답변이 돌아올 뿐
쿠빌라이 칸을 설득할 수 없었다.
원종은 원나라가 전쟁준비로 고려백성들을 핍박하지 못하도록 보호하며,
삼별초의 내분을 이끌어내어, 남아있던 무신정권의 세력을 토벌하고,
병력을 재정비하며 최소한의 자주성을 지키려 애썼다.
하지만 원나라의 강압을 다 막아내지는 못하였고, 일본정벌 하기 얼마 전 세상을 떠나고 만다.
[충렬왕]
쿠빌라이 칸의 칸위계승과 관련한 원종과의 인연으로 인해,
쿠빌라이 칸의 막내딸과 결혼한 충렬왕은,
1274년 왕이 되자마자 원나라의 일본정벌을 시작하게 된다.
쿠빌라이 칸의 주력군은 남송과의 전쟁을 진행하고 있어,
몽골인 지휘관과 거란/여진족으로 구성된 군사들을 보내었다.
충렬왕도 원나라의 요청으로 고려군사를 함께 일본정벌에 보낸다.
[일본]
일본의 왕은 고려왕조와 삼별초를 통해,
원나라의 침략 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다.
일본은 삼별초가 같이 힘을 합치자는 제안을 거절하였고,
삼별초는 진도를 거쳐 제주도에서 대패하고,
류큐국으로 넘어가게 된다.
일본은 원나라의 침략에 대비해 준비하려 했으나,
바다넘어 오는 외세의 침략을 경험해본 적이 없어,
무엇을 준비해야할지 몰랐다.
[1차 일본정벌]
원나라도 일본도 서로 낯선 교전에 서툰 실수가 많은 상황에서,
고려군의 활약으로 일본은 계속된 패배를 겪으며 밀리고 있었다.
일본은 패망직전이었으나,
갑작스러운 태풍에 여몽연합군은 고려와 원나라로 돌아가고 만다.
[원나라]
쿠빌라이 칸이 남송을 정복한 뒤,
일본으로 보낸 원나라 사신들이 시체로 돌아온 사건이 발생하자,
다시 일본 정복의 결심을 굳히게 된다.
쿠빌라이 칸은 일본 정복과 함께, 이미 정복한 남송의 세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남송에서 대규모 징병을 해서 일본정벌에 보낸다.
[충렬왕]
충렬왕은 2차 일본정벌의 준비를 이유로 들어,
고려의 국력강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독자적인 호구 조사권과 군 통수권의 회복 등 일곱가지 사항을
쿠빌라이 칸에게서 승인을 받아낸다.
[일본]
1차 침략 때 있었던, 잔혹한 원나라군의 약탈과 횡포에 치를 떨며,
2차 침략에 대비하여 결사항쟁의 각오로 준비를 한다.
수비를 넘어 반격할 태세로,
세금을 걷어들이고 병선과 병력을 모으고 있었다.
[2차 일본정벌]
1281년 여몽연합군의 2차 일본정벌이 시작되었다.
농민 위주의 훈련안된 남송 징병군으로 구성된 원나라의 군대는
1차 일본정벌 때와는 다르게 일본의 거센 저항에 많은 고전을 한다.
고려군은 1차 일본정벌 때와 비교해서 소극적인 자세로 임하고 있었다.
다시 태풍이 불고, 여몽연합군은 후퇴하게 된다.
원나라의 지휘관은 남송 군사들을 일본에 버려둔채 원나라로 돌아갔다.
[원나라]
원나라는 내부 반란과 제국의 과도한 확장으로 인해 제국의 통치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때 위협되는 세력을 제거하는데, 일본정벌은 정말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하고,
쿠빌라이 칸은 3차 원정을 계획했다.
하지만, 쿠빌라이 칸의 죽음으로 3차 원정은 일어나지 않는다.
일본을 공격할 목적이 사라지자,
원나라의 시선은 고려로 돌아왔고, 더 많은 세금과 자원을 요구하며 고려를 괴롭혔다.
[일본]
일본은 두 차례의 침략을 막아냈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전쟁으로 인해 일본은 심각한 경제적, 사회적 손실을 입었고,
일본 내부의 전후처리 문제로 국가 체계가 무너지고 분열되고 만다.
이런 배경으로 왜구가 엄청나게 불어나서 활개를 치기 시작했고,
대마도는 왜구의 소굴이 되어 버린다.
[고려]
고려는 두 차례의 원정 동안 백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원나라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충렬왕은 고려 내부의 체제를 정비하며 원나라의 간섭 속에서도 자주성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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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조 신혁할아버지는 원나라의 핍박과 일본과의 전쟁을 하는 시기에,
충렬왕의 곁에서 밀직부사이면서 상의회의도감사로
밤새도록 회의를 하셨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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